신앙의 재건이 일어나는 때

[대하15:8-9]
8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들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없애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도 없애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고
9 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에서 나와서 저희 중에 머물러 사는 자들을 모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진정한 영적 성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재고(rethinking)와 재건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의 필요는 대부분 삶의 환경에서 경험한다.”

1. 기독교 가정과 공동체에서 자라는 자녀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가 1844년에 쓴 ‘종교적 경험에 관한 고찰’(Thoughts on Religious Experience)의 2장에서 알렉산더는 믿음 좋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경우, 수년에 걸쳐 ‘영적 감동’이라는 체험을 많이 한다고 관찰했습니다. 1-2년에 한 번 정도 신앙의 성장에서 이런저런 굴곡을 경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제대로 믿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는 시기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관찰을 통해서 알렉산더는 부모들에게 자녀들이 겪는 다양한 경험 중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회심인지, 어떤 것이 준비이고, 어느 것이 재헌신인지 알아내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분별하기 매우 힘든 이유도 있지만 중요한 건 열두 살 아이가 여덟 살 아이보다는 세상과 자신의 마음을 훨씬 더 잘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이 점이 의미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믿음으로 자라는 아이들은 지속적으로 ‘신앙의 기초로 돌아가고’ 또 끊임없이 자신의 믿음을 ‘재고’할 기회의 과정을 거치면서 믿음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고려해야 할 것은 교회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아이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닌 율법주의나 공의가 없는 자유를 가르치면, 첫번째의 경우 아이들은 교회 안에서도 경쟁을 하거나 다른 친구들을 비난하는 왜곡된 신앙을 가집니다. 두번째의 경우, 공의가 없는 사랑이나 자유는 교회 밖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비진리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부모의 곁으로부터 독립할 때즘 자연스럽게 교회로부터도 독립하는 길로 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즉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공의가 이루어졌고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올바른 복음을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교회에 많은 프로그램이 있고 종교적 의미를 담는 예전이 있어도 그것들로는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복음만이 우리 자녀들과 우리 자신을 율법주의와 방종을 따르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이끌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우리 자신과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는 공동체로 살고 있는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2. 고통과 불의를 경험할 때도 복음 안에 있다면 영적 성숙과 신앙의 재고를 위한 재건이 일어난다.

[시편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진정한 영적 성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재고(rethinking)와 재건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의 필요는 대부분 삶의 환경에서 경험한다.”

시편은 믿는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나 박해를 통한 학대를 겪을 때 만나는 ‘신앙적 해석’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시편은 불공정과 박해 속에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싸움인지에 대해 매우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시편에서 시편 39편과 88편은 유일하게 감사의 내용도 없고 그 어떤 신앙적인 다짐도 없이, 단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를 바라는 시편 기자의 말로 끝납니다(시 39:13). “[시39: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그러나 시편 119편은 고난이 주는 혼란과 질문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깊이 헌신하게 된 디는것을 반복해서 고백합니다(시 119:67, 71, 92). “[시119: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시편 39편이 비록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내용이 없고 반면 다른 시편들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가득 하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시편 모두가 ‘믿음에 대한 싸움’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 재건의 여정과 관련한 보다 완전한 사례 중 하나를 우리는 시편 73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삶의 불의, 사람들을 압제하는(8절) “악인의 번영”(3절), 그리고 오히려 그 때문에 악인이 더 유명해지고 강력해진(10, 12절) 현실 때문에 절망합니다. 시인은 거의 믿음을 잃어버리고(2절),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믿음도 같이 나락으로 떨어집니다(15절).

시인이 그토록 절망한 이유를 돌이켜 보면, 그가 욥의 비참한 위로자들(욥의 세 친구)과 다를 바 없는 순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신앙은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선하고 충성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항상 좋은 삶을 주고, 나쁜 사람들에게 그에 걸맞은 비참한 삶을 주실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3절).(잘못된 믿음)’ 이런 착각에 빠진 믿음은 결코 현실 세계를 제대로 견딜 수 없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번성하는 행악자들을 보며 그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16절). 그는 “마음이 근심”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거친 짐승”처럼 도전했습니다. 그의 ‘심각한 고난’ 아예 믿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그가 가진 믿음의 일부(잘못된 믿음)는 재건에 필요한 길을 만들기 위해서 해체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6b절). 결국 그는 자신의 시간 개념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공의가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심지어 다음 세상에 가서야 최종적인 결론이 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분깃”(26절)이며, 궁극적인 부요 최고의 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다. 이 세상의 어떤 지위나 위안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삶의 고통과 불의를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 대부분은 사실 거의 매일 크고 작은 고통과 불의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우리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방어기재가 발동됩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 불의는 우리가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을 깨닫게 하고 참된 사랑과 공의를 이루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진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삶의 고통과 불의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에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셨다는 진리입니다. 이제 고통과 불의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완전히 해결될 것이며 거기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믿음을 지키려고 했던 이들은 참된 안식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고통과 불의도 영적 성장을 위한 재료와 신앙의 재건을 위한 재료가 됩니다. 그러니 삶이 힘겨울 때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복음을 더 깊이 묵상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기독교 지도자와 자신에 대한 환멸로부터 믿음을 재건하는 방법

[행14:11-18]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진정한 영적 성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재고(rethinking)와 재건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의 필요는 대부분 삶의 환경에서 경험한다.”

많은 사람이 존경하던 그리스도인이 위선자로 판명되는 경우에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떤 지도자는 말 그대로 ‘이중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지도자는 폭압적이고 권력에 굶주린, 교묘하고 부정직한 방법을 동원해서 오로지 돈과 물질만 탐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지도자의 정체가 드러나는 경우에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환멸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설교자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이 “내가 우상으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지적했듯이, 공동체가 목회자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맥체인은 자신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들을 우상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바울을 경배했던 사람들(행 14:12-13)이 정작 나중에 그를 돌로 치고 죽은 자로 내버려 둔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행 14:19). 나는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이슬 아래서 오로지 그리스도께로만 더욱 가까이 나아가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더 이상 사람 속에서 영광을 찾지 않고 사람을 자랑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17]

맥체인은 사도행전 14장에서 군중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바로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죽이려고 했던 사건을 인용합니다. 맥체인이 여기서 지적하는 포인트는 중요합니다. 타락한 지도자에 대한 깊은 슬픔과 실망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로 인해서 믿음마저 완전히 증발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보다 지도자에게 더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신뢰할만한 사람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사람에 대한 실망과 환멸은 미성숙한 믿음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너무 높은 의존성은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죄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실체가 드러나는 곳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성도들의 모임에서 나타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사랑과 신뢰와 믿음이 시작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과의 친밀한 관계와 복음을 들을 때 나타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믿음의 근본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얻으려고 하면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환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충성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날마다 사모하고 그분 안에 거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시는 평강으로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샘솟는 사랑과 은혜를 붙들고 있으면 사람이 우리에게 실망을 안기는 일을 경험한다고 해도, 오히려 사람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며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으로 부터 흐르는 사랑과 은혜가 없다면 공동체는 사람의 인내심과 서로 다른 사랑의 방법으로 서로를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인내심과 사랑은 곧 바닥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목회자, 리더, 공동체의 형제 자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이 공급하시는 사랑과 은혜로 서로를 섬길 때 환멸과 실망을 넘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신앙의 재고 재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의 비밀은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의존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공동체를 하나로 묶고 끝까지 서게 하는 것은 공동체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4. 근본적인 믿음과 부수적인 믿음을 구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을 때 신앙은 방향을 잃는다.

갈라디아서1:6-8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진정한 영적 성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재고(rethinking)와 재건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의 필요는 대부분 삶의 환경에서 경험한다.”

사람들이 해체에 얽매이고 결코 재건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에서의 속죄, 죽은 자 가운데서의 육체적 부활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을, 이차적인 각종 믿음과 구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부수적인 믿음을 더 중요하게 부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차적 믿음이란 예를 들어서, 창조, 지구의 나이, 진화를 둘러싼 문제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또는 종말 예언과 같은 문제도 포함됩니다. 근본적인 믿음과 이차적인 믿음의 구별이 전혀 없는 교회에서 양육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경우, 교회에서 배운 모든 가르침이 다 똑같이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그것이 다루어 지지 않고 있다면 젊은 사람들에게 이차적인 믿음이 의심스럽고 근거가 약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아가서 교회에서 배운 모든 것에 다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접할 때, 기억해야 할 점은 실제 믿음 뒤에는 다른 믿음과 태도, 그리고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정말 나쁜 사람이고, 참된 신자의 삶은 언제나 잘 풀리기 마련이라는 등등, 암묵적인 잘못된 생각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배경이 되는 믿음이 실제로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의 일부일까?라고 질문한다면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까 젊은 신자들은 경험을 통해서 얼마든지 잘 되는 불신자를 만나고 오히려 열심히 믿을수록 끔찍한 일을 만나는 신자를 보게 됩니다. 또한 신자들이 짓는 죄가 더 크게 보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적인 해답을 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근본적인 믿음이 아닌 이차적인 믿음을 근본적인 믿음과 동일시 할 때 믿음에 관한 의문이나 상실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 전체를 향해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듭니다.

교회공동체는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공의로부터 시작되는 복음을 포함한 그분의 사역의 의미를 가르치고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과 앞으로 우리에게 이루실 일을 다루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믿음을 다루는 것이라면 선악과를 왜 만드셨을까와 같은 것은 이차적인 믿음입니다. 이차적인 믿음을 다루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믿음에 대한 기독교젹 해석을 해야 하지만 이차적인 믿음을 근본적인 믿음과 동일시 해서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가르치게 되면 불필요한 의문에 휩싸여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오해를 불러오고 오히려 근본적인 믿음을 저해시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공동체는 근본적인 믿음을 배우고 체질화 되는 일에 힘을 모을 때, 신앙의 재고와 재건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성경이 말씀하는 근본적인 진리를 알고 배우고 체질화 되어 있는지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신앙의 근본이 약할수록 빨리 무너지고 회복이 더딥니다. 주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주님이 가르쳐 주신 복음이 체질화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5. ‘거품’ 속에서 사는 신앙으로부터 신앙을 재고하고 재건하는 방법

사도행전 17:11 KRV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진정한 영적 성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재고(rethinking)와 재건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의 필요는 대부분 삶의 환경에서 경험한다.”

사람들이 ‘신앙을 잃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에 우호적인 안전한 장소, 즉, ‘거품’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해 아예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모두가 다 믿으니까 그냥 당연히 믿는다고 생각하며 성장한 경우가 여기에 속합니다. C.s.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인생이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종교도 사람들에게 단순한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서 단순한 위로와 답을 얻으려고만 생각하고 특히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과연 그러한가’라는 태도를 가지고 우리가 믿는 것을 확인지 하지 않고 살아갈 때, 인생에 문제가 없을 때는 괜찮지만, 인생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며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석할 수 없는 곳까지 이르게 될 때,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믿는 기독교가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종교라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신앙해체를 선언하고 교회공동체를 떠나고 말것입니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직관적입니다. 하나님의 직관적인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최소한으로 기록한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사건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진리에 대해서 믿고 수용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관적인 믿음을 주셨다면 그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음 안에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투자해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확신하는 일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참되게 알기 위한 몸부림일 뿐만아니라 세상이 복잡하고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그 세상에 대한 유일한 답을 주는 성경의 진리도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또한 성경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답이 되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한번 제대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지적이고 체험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가지공동체는 얼마든지 신앙이 자라고 깊어질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것을 충분히 누리고 우리 안에 있는 신앙적 거품이 제거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댓글

Scroll to Top